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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크레더블, 평범한 하루를 버티며 다시 배우는 가족과 용기의 진짜 의미

by 서하qq 2025. 8. 24.

영화 인크레더블 포스터
영화 인크레더블 포스터

 

픽사의 ‘인크레더블’은 초능력으로 도시를 구하는 화려한 장면보다, 밥이 좁은 cubicle에 끼어 앉아 한숨을 쉬는 그 순간이 더 오래 남는 영화다. 영웅이었던 사람이 평범한 가장으로 돌아와 장바구니를 들고, 보험 서류를 정리하고, 때로는 실패를 삼키는 장면이 낯설지 않다. 우리도 비슷하게 산다. 대단한 일을 하진 못해도, 내 곁 사람을 지키려고 버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초능력의 이야기를 빌려, 결국 “가족이 팀이 되는 방법”을 말한다. 과거의 박수보다 오늘의 식탁이 더 중요하다는 걸 인정하는 과정, 아이들의 ‘특별함’을 숨기지 않고 같이 다루는 연습, 그리고 서로의 서툼을 받아들이는 시간이 이 영화의 진짜 액션이다. 화려한 영웅담이 아니라 생활의 땀과 다정함으로 쌓아 올린 이야기라서, 엔딩에 이르면 결국 고개가 끄덕여진다. 우리 각자가 작은 영웅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으니까.

슈퍼라는 말 뒤에 숨겨둔 답답함

영화 초반부터 밥의 표정이 모든 걸 말해준다. 한때는 무너지는 건물을 어깨로 받치던 사람이, 이제는 복사기 옆에서 억지 미소를 붙인다. 회사는 성과보다 규정을 사랑하고, 고객을 돕고 싶은 그의 본능은 시스템에 막힌다. 도와주면 혼나고, 모른 척하면 마음이 찜찜하다. 이 딜레마가 꽤 아프다. 화려한 영웅담보다 이 회색빛 장면이 더 현실적이라서 그렇다. 영웅 등록제가 내려지고, 능력을 봉인한 채 살아야 하는 설정은 거창한 은유가 아니다. 우리도 저마다의 장점이나 욕망을 ‘지금은 때가 아니야’라며 눌러본 적이 많다. 밥만 그런 게 아니다. 헬렌은 늘 ‘괜찮아, 여기가 우리 자리야’라고 말하지만, 마음 한켠에서 늘 긴장을 푼 적이 없다. 아이들을 안전하게 지키려면 규칙을 지켜야 하고, 규칙을 지키다 보면 아이들은 자기 자신을 숨긴다. 대쉬는 트랙에서 일부러 속도를 줄이고, 바이올렛은 투명해지는 능력처럼 존재 자체를 투명하게 만든다. 잭잭은 아직 태그가 붙지 않은 ‘가능성’이라서 더 불안하고 더 사랑스럽다. 이 집의 공기는 늘 조금 빡빡하다. 서로가 서로를 너무 사랑해서 더 조심스러워진 집. 그게 이 가족의 출발점이다.

그래서 밥이 몰래 과거 영웅 친구와 ‘도와주기 놀이’를 하는 게 이해된다. 누군가를 구했을 때 심장에 피가 도는 느낌, 나는 아직 쓸모가 있다는 확신. 어른이 되어 가장 먼저 잃어버리는 건 그 확신이다. 밥은 그걸 붙들고 싶다. 헬렌은 알아챈다. 남편이 어딘가에서 다시 뛰고 있다는 걸. 다만 말하지 않는다. 말하는 순간 버티던 균형이 무너질 것 같아서. 이 묵묵한 침묵이 이 집의 또 다른 언어다. 덕분에 관객 입장에선 이 가족이 이미 ‘팀’이라는 걸, 다만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지키는 중이라는 걸 조용히 알게 된다.

다시 불붙는 욕망, 그리고 진짜 팀이 되는 법

의문의 임무가 날아오고, 밥은 오랜만에 ‘몸이 기억하는’ 감각을 되찾는다. 철문을 부수고, 던지고, 달리고, 숨이 차오르는 그 리듬. 그런데 영웅담이 다시 굴러가자마자 균열도 커진다. 비밀이 생기면 집은 어두워진다. 헬렌은 감지하고, 조사하고, 결국 아이들과 함께 바다를 건넌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노골적으로 가족물의 톤을 올린다. 초능력은 장르를 위한 도구에서 관계를 보여주는 언어로 바뀐다. 헬렌의 신축성은 엄마가 늘 해오던 일의 물리적 버전 같다. 여기 늘리고 저기 줄이며 아이들을 감싼다. 바이올렛의 방어막은 소심함의 뒤집기다. 숨어들기만 하던 손끝이 이제는 모두를 품는다. 대쉬의 속도는 장난의 에너지에서 책임의 방향으로 궤도를 튼다. 아빠의 괴력은 허세가 아니라 버팀목으로 다시 태어난다. 같은 힘인데 쓰임이 달라지자 의미도 달라진다. 이 변화가 통쾌하다.

신드롬의 악역 서사는 의외로 씁쓸한 거울이다. 인정욕구가 상처를 먹고 자라면 복수는 얼마나 그럴듯해지는지, ‘모두를 특별하게’ 만들겠다는 말이 어떻게 모두를 평평하게 망쳐버리는지. 밥이 예전에 내뱉은 무심한 거절이 한 사람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영웅과 악당 사이의 거리는 멀지 않다. 관계 하나, 말 한마디, 놓친 손길 하나가 만든다. 이건 영화 바깥의 우리 얘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밥이 신드롬을 힘으로만 이기지 못하는 게 자연스럽다. 관계로 만들어진 상처는 관계로만 봉합된다. 가족이 합류해야 이길 수 있다.

섬에서 벌어지는 연속 장면들은 작은 교본 같다. 헬렌이 비행기 난기류를 온몸으로 버티며 아이들을 지키는 신, 물 위를 미친 듯이 내달리는 대쉬의 발소리, 바이올렛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방어막을 키워내는 순간, 그리고 밥이 울컥하며 “너희 잃을까봐 겁났다”라고 말하는 장면. 여기엔 대사보다 호흡과 눈빛이 많다. 가족이 팀이 되는 순간, 각자의 결핍은 서로의 능력으로 덮인다. 혼자였을 때 단점이던 게, 함께일 때 장점으로 뒤집힌다. 이건 회사에서도, 친구 사이에서도, 연애에서도 그대로 통한다. 상대의 다름이 거슬릴 때, 그 다름이 결국 나를 살릴 수 있다는 걸 까먹기 쉽다. 영화는 그걸 아예 액션으로 박아 넣는다. 총알이 날아오면 방어막, 옆에서 누군가가 속도를 얻으면 길 열어주기, 무거운 건 누군가가 들어주기. 단순하지만, 그래서 진짜다.

도시로 돌아와 로봇과 맞붙는 클라이맥스는 상징이 뚜렷하다. 신드롬이 사랑한 건 ‘조작 가능한 질서’인데, 그 질서의 중심을 빼버리니 괴물 스스로 자멸한다. 가족도 비슷하다. 한 사람이 모든 걸 통제하려 들면 결국 모두가 불행해진다. 반대로 역할을 나누고 신뢰를 돌리면, 중심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된다. 그래서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영화는 이 원리를 큰 소리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함께 뛰고 구하고 웃게 만든다. 보고 나면 몸이 먼저 안다. 아, 같이 해야 되는구나.

영웅의 조건은 화려함이 아니라 곁을 지키는 마음

엔딩이 좋은 이유는 박수의 방향이 바뀌기 때문이다. 예전엔 도시의 환호가 밥을 살렸다면, 이제는 식탁의 소음이 살린다. 아침에 도시락 싸고, 학교 행사에 가고, 차 트렁크에서 장을 내리고, 주말에 애를 태우고 뛰는 그 반복. 특별하지 않아서 귀한 일. 밥과 헬렌은 여전히 서툴고, 아이들은 여전히 엇나가고, 잭잭은 예상 못 한 순간에 불을 뿜거나 공중을 난다. 그런데도 집은 무너지지 않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서로의 곁을 지키니까. 영화가 던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영웅은 능력이 아니라 방향이다.” 내 힘을 나만 위해 쓰면 허세가 되고, 누군가를 위해 쓰면 용기가 된다. 같은 팔, 같은 다리인데 방향만 바꾸면 다른 이름이 붙는다.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마음에 남는 건 액션보다 호흡이다. 평범한 숨, 서로 확인하는 눈짓, 실수했을 때 내밀어주는 손. 이건 영화가 끝나도 계속할 수 있는 일이다. 초능력은 필요 없다. 오늘 집에 먼저 들어와 밥을 하고, 미뤄둔 사과를 하고, 애가 한 자라도 더 웃게 만들고, 친구의 문자를 놓치지 않고, 부모님에게 전화를 먼저 거는 일. 그게 ‘우리 버전의 영웅짓’이다. 인크레더블이 굳이 슈트를 벗겨 보여준 건, 영웅이 이미 우리 옷장에 걸려 있다는 사실이다. 내일도 다시 입으면 된다. 구겨져도 괜찮다. 함께라면 다시 펴지니까.